신이충(愼以衷)
[요약정보]
UCI | G002+AKS-KHF_13C2E0C774CDA9U9999X0 |
초명(初名) | 신유충(愼由衷) |
시호(諡號) | 양렬(襄烈) |
생년 | ?(미상) |
졸년 | ?(미상) |
시대 | 조선전기 |
본관 | 거창(居昌) |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
부 | 신인도(愼仁道) |
[상세내용]
신이충(愼以衷)
생졸년 미상. 조선 전기 문신. 초명은 신유충(愼由衷).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좌복야(左僕射) 공헌공(恭獻公) 신수(愼修)의 후손으로, 부친은 증호조판서(贈戶曹判書) 신인도(愼仁道)이다.
1377년(우왕 3) 연방시(蓮榜試)에 급제하였으며, 신돈(辛旽)의 횡포에 항의하여 연맹(聯盟) 상소를 올렸다. 조선 개국 후 1397년(태조 6) 황해도감찰(黃海道監察)이 되었으나, 1410년(태종 10)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아전을 때려 죽인 일과 아버지 상중(喪中)에 종과 양민을 때려 죽인 일로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았다. 세종조에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와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관직생활 동안 양녕대군 등 종친의 비위를 고발하는 상소를 자주 올려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단종 조에 벼슬을 그만두었다.
아들로 문과 신기(愼幾)‧신언(愼言)‧문과 신전(愼詮)을 두었다.
좌복야(左僕射) 공헌공(恭獻公) 신수(愼修)의 후손으로, 부친은 증호조판서(贈戶曹判書) 신인도(愼仁道)이다.
1377년(우왕 3) 연방시(蓮榜試)에 급제하였으며, 신돈(辛旽)의 횡포에 항의하여 연맹(聯盟) 상소를 올렸다. 조선 개국 후 1397년(태조 6) 황해도감찰(黃海道監察)이 되었으나, 1410년(태종 10)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아전을 때려 죽인 일과 아버지 상중(喪中)에 종과 양민을 때려 죽인 일로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았다. 세종조에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와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관직생활 동안 양녕대군 등 종친의 비위를 고발하는 상소를 자주 올려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단종 조에 벼슬을 그만두었다.
아들로 문과 신기(愼幾)‧신언(愼言)‧문과 신전(愼詮)을 두었다.
[참고문헌]
대한마이산묘지
거창신씨문헌록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태조실록
태종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index.jsp)
거창신씨문헌록
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
태조실록
태종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http://people.aks.ac.kr/index.jsp)
[집필자]
박경이
수정일 | 수정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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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 2009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